Made in Midnight - Leaving, Living: 가능하겠어? (2024)

시리즈의 번외

신곡을 연습할 때는 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작곡을 할 마음은 들지 않고 시도도 안 해봤고 가끔 가사 쓸 때 의견을 내는 게 전부인 선우가 할 말은 아닐 수도 있지만, 종성과 희승은 사람을 좀 피곤하게 한다. 희승은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결국 ‘내 마음에 들 때까지 해보자’는 말을 곱게 꾸며서 하는 것뿐이다. 종성은 연주를 맞춰보다가 갑자기 ‘잠깐만 고치고 싶은 데가 생겼어 이렇게 해보면 어때?’하고 갑작스런 즉흥 연주를 하고, 재윤은 ‘어. 별로야.’하고 늘 일단 태클을 건다. 선우가 듣기에는 그거나 그거나였기 때문에 희승이 정리해주기 전까지 그 싸움은 이어지고 선우는 당연히 그럴 때 재윤의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지만

둘의 사이는 둘만 아니까. 넷만 있는데 비밀연애라니 좀 우습기는 한데 그때는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이렇게 오래 비밀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비밀로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그날 알게 되었다. 그날도 평범한 날. 재윤이 우리 잠깐 쉬고 할까? 제안했을 때 선우는 좀 답답하고 지친 상태였다. 재윤이 그걸 알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그래! 라는 말도 없이 일어섰다. 선우도 스틱을 내려놓고 일어섰고 희승은 소파에서 빤히 보고 있던 정원에게 얼른 다가가 옆에 앉아 머리를 쓸어 준다. 본인도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 심심해? 배고파? 라는 질문에 모두 고개를 젓는 정원에게, 선우도 가까이 걸어가니 눈을 들어 쳐다본다.

“나 산책하고 올게. 정원이도 같이 갈래?”

조금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일어선다. 선우가 웃으며 손을 잡아주자 희승은 자기도 갈까, 잠깐 고민하는 것 같다가 피곤한 한숨을 뱉었다.

“맛있는 거 사와.”

“정원이가 먹고 싶은 거 사올게.”

이제 정원을 보고 지낸 것도 일 년 정도 되었다. 정원은 말수가 많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갈 때쯤부터는 잘 웃고 장난도 잘 치고, 또래 애들하고는 잘 안 놀아도 여기의 넷 그리고 다른 업계 관계자들과는 익숙해서 잘 지내게 됐지만 이때는 그랬다.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지? 걱정했는데 희승 말로는 자기랑 있을 때는 잘 한다고 했다.

하긴 처음 봤을 땐 말을 한 마디도 안 하고 희승 옆에만 붙어 있었다. 그땐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갑자기 사흘을 쉰 희승은 처음 보는 애를 데리고 나타났다. 사흘 동안 저 애를 어디서 만들어온 건가? 사람이 아니라 인형 같은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조용했던 정원. 희승은 상상도 못한 답을 내놨다. 악마가 주었다고. 당연하지만 어린애를 달라는 소원을 빈 건 아니고 그냥 밴드가 잘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빌었다는데 이 애를 잘 키우면 된다는 조건을 걸었다고… 일단 바쁘게 일어서 우유를 사러 나갔다. 여기 있는 세 명은 다들 묘하게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지 못해서. 애를 이 시끄러운 데 데려오면 어떡해? 라는 생각을 했지만 다른 갈 데도 없긴 하겠네. 돌아오자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한 표정으로 모여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던 셋을 보니, 역시 그렇지. 라는 생각을 했다. 희승에게 자세한 얘기를 좀 더 들으면서, 선우는 왜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었을까?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재미있잖아. 희승이 어디서 무책임한 관계의 결과로 자기도 모르는 아이를 만들었고 발뺌하다 이제야 어쩔 수 없이 책임지게 되었다 - 이런 뻔한 얘기는 재미있지도 예쁘지도 않잖아. 오래 본다고 사람을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희승과 보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희승이 그런 사람일 것 같진 않다는 생각으로. 그 옆에 딱 붙어 있는 정원은 말을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것처럼 눈을 깜박이고, 여전히 다른 세 명에겐 가까이 오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우유도 사다줬는데 서운하게.

근데 형, 그럼 영혼을 팔았어요?

팔려고 했는데 필요 없대.

그럼 잘 된 거잖아. 어쩐지 실망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희승이 웃겼다.

그리고 일 년. 밴드가 정말로 예전보다는 조금 유명해졌다. 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대부분 노래 좋다 혹은 보컬 잘한다 혹은 잘생겼다였는데 그건 어떤 밴드든 다 똑같으니까 별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드러머 귀여워’라는 반응을 가끔 발견하면 속으로 은근히 좋아하기 정도.

어쨌든 정원은 익숙한 거리를 걷는 동안에도 말이 없었지만 선우가, 새로 생긴 젤라또 집을 가리키며 저거 먹어볼래? 하자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웠다. 정원과 콘을 하나씩 들고 같이 먹을 걸 포장해서 돌아오는 길은 당연히 즐거웠다.

너무 빨리 돌아왔을까? 그러지 않았다면 그 대화를 듣지 못해서 그 다음의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전부? 그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도… 아니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기억상실에 걸린 것처럼. 어떤 사실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 앞과 뒤의 디테일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그때는 알지 못했다. 조심성 없이 나누던 셋의 대화를 물론 선우가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고. 그저 그들이 선우를 덜 조심하게 되었던 게 아닐까? 결정적인 말을 들어도 농담이라 생각할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있었다. 선우는 전에도 여러 차례 그들의 대화 속 이상하게 들리는 부분에 대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웃으며 넘겼다. 지금 뭐 착각한 거 아니에요? 지적하고 넘어갔다.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조각들이었단 걸 깨닫는 순간.

우리가 정말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래 참았는데. 요즘은 흡혈을 하면 큰일나. 뱀파이어들도 얼마 안 남았잖아.

선우가 눈치챘을까?

선우는 늘 가장 맞는 말을 하지. 우리가 그걸 뭐라고 하겠어.

영원히 살지도 못하면 조용히 하라고?

뱀파이어가 있다고 정말로 믿는 사람이 요즘 어디 있어?

하지만 선우는 악마도 믿었잖아.

이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멀찍이 다시 걸어나갔다가 한참 후에 긴 산책을 한 척,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과 함께 돌아왔어야 하나? 하지만 정원은 선우를 의아한 듯 올려다보고 문을 밀었다. 갑자기 공기가 깨지듯 그 자리를 채운 날선 침묵. 마주치고 만 눈.

아니 가장 확실한 증거는, 여섯 개의 눈이 동시에 선우를 보며 만든 표정. 왜 입술 틈새로 송곳니가 보이는 것 같았을까? 선우의 마음이 만들어낸 편견일까? 들었지? 알아챘지? 라고 묻고 있는 표정. 인간같지 않은 섬뜩한 얼굴.

얼어붙어 서 있는 선우의 팔을 재윤이 아프게 낚아챘다. 눈을 찡그리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그대로 구석 방의 문을 열고 선우를 안으로 밀어넣으며, 눈이 마주쳤다. 문이 쾅 닫히기 전에 순간 마주친 재윤의 표정은

들켰구나.

널 절대 해치지 않을게.

두 가지가 동시에 있는 눈에… 선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이 얼어붙어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문을 두드리며 외친다 해도, 누가 들어줄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늘 오라는 곳은 많았지만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선우가 생각해도 선우는 꽤 괜찮은 드러머였고, 밴드 생활엔 잘 맞지 않았다. 아니 대부분의 밴드맨들과 잘 맞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하는 거고, 선우 정도의 드러머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왠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드럼을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첫 일주일 안에 지겹다고 때려치는 사람이 80% 정도는 되고, 드럼을 어느 정도 배우게 되면 이게 생각보다 힘든데 생각보다 멋지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드러머는 관객에게서 가장 먼 곳에 있으니까. 앞에 서 있는 보컬과 기타리스트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덜 보인다는 것은 조금 더 멋대로 해도 된다는 거고 싸움에서 한 발짝 빠질 수 있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으로 옮겨도 티가 덜 나니까. 힘들게 구한 드럼을 다시 어디서 구하나 붙잡은 곳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선우는 굴하지 않고 그만뒀다. 역시 이번 생에 프론트맨은 못 할 팔자네… 그런 건 뭐, 이희승 같은 사람이 하는 거 아닌가. 공연도 몇 번 조금 봤고 지나가다 인사는 해본 적 있는 정도였다. 희승과 같이 밴드를 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 건 알지만, 또 거기 드럼이 자꾸 바뀌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갈 곳이 정해진 게 아니라면 고려해달라는 연락이 두 다리 정도 건너서 왔을 때. 흥미로웠다. 실력 확실하고 싱싱한 드럼 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이 단톡방에서 공유라도 되는지 연락 온 데가 거기만은 아니었지만 궁금했다. 어쨌든 이희승은 잘하니까. 우리 밴드에 저런 보컬이 있으면 좋겠는데, 한숨 쉬는 소리도 많이 들어봤고.

하지만 사람들이 계속 그만둔다는 건 블랙회사의 가능성이 높다는 거니까. 전에 거기서 드럼을 치다 나온 (친구는 아니고 그냥 아는)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답은 애매했다.

걔네 좀… 그래. 쎄해.

쎄하다는 건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이상한 게 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는 뜻이잖아? 그래서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왜? 때렸어? 돈을 떼먹었어? 성희롱을 했어?

뭘 물어봐도 답은 다, 그건 아닌데… 하고 끝을 얼버무리는 말이었고 선우는 다 아니면 뭐 한번 가보자. 선우가 싫어하는 캐릭터의 밴드맨들이 싫어하는 밴드맨들. 적의 적은 친구일지도 모르니까. 라는 마음으로 연락을 해 봤고 오늘 바로 오셔도 된다는 엄청난 환호를 들었고, 그날 바로 영입이 결정되었다. 역시 뭔가 결격사유가 있어서 이렇게 급하게 붙잡는 게 아닐까? 의심하긴 했다.

하지만 희승과 종성은 좀 이상한 사람들인 건 확실한데 나쁜 쪽은 아니었고 소문으로 듣고 멀리서 볼 때 생각했던 것처럼, 가까이서 봐도 실력은 확실했다. 밴드 경력이 300년쯤 되는 사람들 같다고. 농담처럼 떠도는 소문에 동의할 수 있었다. 아쉬운지 다행인지, 둘을 알아갈수록 선우의 취향도 아니었고 둘의 취향이 선우인 것 같지도 않았다. 사적인 인간관계도 많지 않고, 다른 밴드들 혹은 팬하고 어울려 술을 마시는 일도 거의 없고.

“혹시 둘이 사귀어요?”

“아니 전혀 아닌데.”

“미친 거 아냐?!”

종성이 담담하게 반박할 때 희승은 소파에서 개구리마냥 펄쩍 뛰어오르며 부정했고 그 소리에 종성도 벌컥 화를 냈다. 뭔데 그렇게 격렬하게 부정하면 내가 뭐가 돼?

뭐가 되긴 나랑 안 사귀는 사람 되지!

너만 싫은 줄 알아? 나도 싫거든?!

둘이 너무 열심히 싸우는 바람에 선우는 이어서 하려던 농담 - 나한테 아무 관심 없어보여서 둘이 사귀나 했지 - 은 꺼내지 못하고 둘을 말려야 했다. 아닌 거 아주 잘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빨리 베이스 구해주세요. 나 그만두기 전에. 라는 말에 금방 비굴하고 천사같은 표정으로 변해서, 우리 저녁 먹고 할까? 종성이가 사줄 거야. 라고 가리키면 종성은 ‘이 싫은 표정은 네가 아니라 이희승한테 하는 거임’을 확실하게 표시한 얼굴로 카드를 꺼냈다.

드럼이 왜 그렇게 많이 그만뒀을까, 선우는 그럴 만한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셋은 연습 시간 외에 따로 모이는 일이 없고 연습 시간만 해도 충분히 길었으니까… 나름 친해졌다. 짧은 시간 내에. 그래서 사실 정말로 베이스가 안 구해진다고 해도 그만둘 생각은 없었지만… 적당한 시기에 왔다.

심재윤이.

밴드는 한 번도 안 해보고 베이스는 취미로 혼자서 배운 게 전부라지만 희승과 종성이 번갈아가며 때우던 상황을 구원해줄 정도는 되었다. 본업인 학원강사를 우선해야 된다고, 늦은 밤과 새벽, 오전에 연습을 해야 하는 상황도 생겼지만… 선우는 나쁘지 않았다. 이제 좀 취향인 사람이 생겼네. 며칠 더 두고보니 얼굴이 아닌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재윤 씨는 착하신 것 같아요.”

처음으로 넷이 같이 술을 마신 날 선우가 방금 비운 작은 잔을 얼굴 옆에 들고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니 약간 조심스러운 얼굴이 된다.

“외국에서 살다 와서 그래 보이는 거 아닐까요? 별로 안 착해요.”

“진짜요? 전 착한 사람이 좋은데.”

이 쪽을 향하는 마음을 알아채는 데 선우는 아주 익숙했다. 굳이 둘이서 밥을 먹자는 말을 하거나 모른 척 어깨에 팔을 걸치고 등에 기대 이야기하는 뻔한 행동이 아니어도, 시선만으로도. 목소리의 끝에서 숨기지 못한 떨림을 듣는 것만으로도.

겨우 며칠만으로도. 몸을 아주 약간 티나게 기울여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변하는 표정. 숨기려 해서 오히려 더 잘 보이는 마음.

“우리 이제 사귈 때 안 됐어?”

고백을 누가 하든 그건 상관없었다. 대부분 상대가 선우의 신호에 확신을 가지고 먼저 말하긴 했지만. 신호도 준 적 없고 관심도 없었지만 먼저 말해 와서 성사된 적도 있고. 선우는 그게 어느 방향이었든 자기가 이기거나 진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재윤은 확신을 못 하는 타입인가 보지. 그럼 먼저 말해야지. 그런 생각을 할 때 자존심 상하거나 싫지도 않았다. 안 착하다는 재윤이 종성과 희승에겐 안 그러면서 자꾸 선우는? 하고 의견을 묻고 챙기는 것, 선우가 힘은 더 셀 텐데 무거운 드럼 세트를 옮길 일이 있으면 좀 오버해서 도와준다고 나설 때. 단둘이서 밥까지는 안 먹어도 무슨 핑계든 대서 카페는 몇 번 간 것. 지금처럼 점심을 먹고 잔다는 둘을 버려두고 나와 산책하다 말고 갑자기 옷을 벗어줄까 같은 뻔한 소리를 할 때. 간질간질한 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너무 오래 끌면 지겨워지니까.

돌아보며 말하니 마주보는 눈은 떨렸는데 선우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표정이었다. 재윤은 아주 위험한 제안을 들었다는 듯 말했다.

“…이러면 안 돼.”

“왜? 나 좋아하잖아.”

얼굴은 이렇게 순식간에 빨개져서는. 목소리는 더 떨린다. 그래도… 안돼. 왤까 흔한 문제 때문에? 치정 관계로 밴드가 깨지고 헤어지면 어색해지고 그런 것들? 재미없는 곳에서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좋잖아.

“왜? 난 밴드마다 애인 만들었었어.“

선우 혹은 애인 때문에 밴드가 깨진 적도 있지만, 밴드란 원래 문제가 많은 곳이니까. 그것만 원인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선우는 상관없다.

“밴드 영원히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

“형이야말로 그렇잖아. 금방 그만둘 거라며.”

재윤은 두려움이 고민으로 바뀐 얼굴이 되었다. 선우는 기다렸다. 망설임 끝에 나온 말은 좀 싱거웠는데,

“…나 그렇게 금방 그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좋아서?”

선우의 말에 의외로 순순히 웃음이 터졌다.

“그래.”

정원을 만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들어오고 보니 정원도 같이 방 안으로 밀쳐져 들어왔다. 정원은 그다지 놀란 표정도 아니었고 그냥 의문이 약간 담긴 정도의 눈이었지만 소리죽여 숨쉬고 있는 걸 보면 지금 여기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정도는 아는 것 같았다. 정원이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한 상황이다. 선우조차 이해하기 힘드니까…

그냥 보낼 순 없잖아. 종성의 말에 대답한 건 분명히 희승이었다.

그럼 어떡해? 죽여?

불안과 두려움에 찼지만 이 말을 망설이지는 않는 목소리. 당연하다는 듯이. 저녁 메뉴를 결정할 때와 다르지도 않은 무게로 하는 말에… 선우는 자기도 모르게 정원을 끌어안았다. 문 밖은 뱀파이어, 문 안은 인간으로 나뉜 이상한 균형. 정원도 선우의 옷깃을 약하지만 확실한 힘으로 쥐고 매달렸다. 정원이 저 말의 뜻을 알아들을까? 겁이 나 손으로 두 귀를 막아주었다. 재윤이 반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너무 위험한데.

어쩔 수 없잖아. 비밀을 알았으니까.

드럼 없는 밴드가 어딨어.

구하면 되지.

또 구하고? 또 죽이려고? 뱀파이어는 결국 다 고만고만하게 다들 알고 있잖아. 결국 또 인간을 데려와야 해.

선우가 어디 가서 우리가 뱀파이어라고 인터뷰라도 할까? 그걸 사람들이 믿을까?

그 대화를 문 너머로 들으며 선우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도 살리려는 사람도 그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도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머리가 아팠다. 정원의 귀를 덮느라 손이 모자라 자기 머리를 짚을 수도 없다.

뱀파이어였다고?

선우는 이상한 상상을 믿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랬으면 좋겠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네거리에서 악마가 나타나? 재밌겠다. 영혼을 팔진 않을 거지만. 그 정도까지가 좋았는데.

문이 다시 열렸다. 희승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살벌한 표정으로 걸어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는 선우의 손에서, 아직까지 꼭 붙잡고 있던 정원을 꽃이라도 꺾듯 떼어냈다. 선우에게서 빼앗듯이. 불쑥, 이 공포감을 누를 정도로 반발심이 들었다.

“왜 그래? 내가 정원이로 협박이라도 할까봐? 난 인간이라서 그런 짓 안 해.”

“아니 인간이야말로 그런 짓을 하지.”

희승은 고개를 저었고 정원은 희승을 올려다보았고 희승은 금방 달래는 표정으로 웃는다. 정원에게 위험한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우가 아니고 이희승인데. 정원의 남은 손을 붙잡자 정원은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모르는 듯, 선우를 보았다가 다시 희승을 보고… 그 눈 안에 뭐가 있었는지 희승은 표정이 복잡해지다가 여전히 경계하는 표정으로 몸을 낮춰 정원을 들어올려 안았다. 선우에게 여전히 호의적이지 않은 표정으로 고갯짓을 했다.

“걱정 마. 죽이진 않을 거니까.”

그것 참 고맙네요. 문은 다시 닫혔고 셋의 같잖은 회의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이제 알게 됐으니 자세한 내용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몸에서 긴장이 풀려 벽에 기대 앉았다. 문이 다시 열리기까지는 한참 걸렸다.

여전히 밴드를 탈퇴하거나 어디 가서 소문을 퍼뜨리면 당장 해코지할 것 같은 표정의 희승과 종성. 그리고 말을 별로 하지 않고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재윤. 선우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아직 정리할 수 없다. 이제 뱀파이어란 사실을 알았으니 헤어져야 하나?

아니 아직 그럴 생각은 없는데. 다들 연습을 할 기분은 아닐 테니. 몇 가지 얄팍한 다짐 끝에 얘기는 마무리됐다. 선우는 머리를 소파에 뒤로 꺾듯 기대 숨을 길게 뱉었다.

“나 힘들어 죽겠으니까 누가 집에 좀 데려다줘.”

이 말은 투정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풀린 몸에 힘이 잘 돌아오지 않았다. 재윤이 얼른, 내가 데려다줄게. 라고 대답했다. 희승과 종성은 여전히 둘의 사이를 혹시? 의심하는 표정은 아니었는데, 들켜 버린 게 더 큰 문제여서인가 생각했는데

상상도 못 해서였던 거였다. 조수석에 앉아 집에 갈 때까지, 아무튼 선우를 좀더 확실히 해치지 않을 것 같은 사람하고 남았는데도 기운이 돌아오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집에 몇 번을 와 봤으면서, 재윤은 조심스레 물었다.

“들어가도 될까?”

“죽겠으니까 업어 달라고 하고 싶은데.”

정말로 업어 줬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 드디어 둘만 남은 문 안, 재윤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등에서 내려 침대에 누운 선우 옆 바닥에 앉아 마주보다, 죄 지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나는 원래 그러면 안돼.”

“뭘?”

“너 같은 약한 존재를… 사랑하면 안돼.”

“……”

“그래서 결국 너를 위험에 빠뜨렸잖아.”

“……”

“나는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이제 넌, 내가 싫겠지.”

그거랑은 상관없는 것 같은데. 어느 못된 뱀파이어들이 자기들이 아쉬워서 인간 드러머 구해 놓고, 들키니까 죽일 마음을 먹었던 게 문제 같은데. 할 말은 선우도 있다. 누울 만큼 힘이 빠졌지만 눈을 날카롭게 뜨고, 말을 날카롭게 할 정도의 기력은 있다.

“왜 난 안 탓하는 거야?”

“……뭐?”

“형은 안 그러고 싶었는데. 결국 내가 우겨서 사귀자고 한 거니까. 그럼 내 탓 아냐?”

“아니 안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고……”

뱀파이어의 정체를 눈치채는 바람에 죽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됐다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험 중엔 상당히 나쁜 결말이긴 한데. 그건 나름대로 논리가 있고 재밌는 에피소드 같았는데.

지금이 오히려 더. 내려다보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인간이 약한 존재라서, 인간과 뱀파이어가 사랑한다면, 반드시 인간만 상처받는다는 거야?”

“……”

“형은 오늘 되게 괜찮았나봐?”

“아니… 하지만 오늘 너에 비하면.”

“날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만 여긴다면 그거야말로 멸시하는 게 아니냐고.”

재윤은 한참 선우를 쳐다보았다. 아직 끌어안을 기분은 아니라 눈만 마주보고 말했다.

“더 재밌어졌어.”

“……”

“뱀파이어는 영원히 살아?”

“영원까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길게.”

“영화처럼 신분세탁 같은 거 해야 돼?”

고개를 끄덕인다. 웃기고, 너무 그럴듯해서,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럼 형도 나 좀더 만나봐도 괜찮잖아?”

언젠가 나를 떠나도.

재윤은 침묵으로 이 말에 동의했다. 그 전에 밴드가 해체할 수도 있고, 인간을 만나도 언젠가 헤어진다. 그건 큰 문제는 아니지만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선우는 나중에, 아주 천천히 깨달았지만

그날 마주본 재윤의 표정이 기억에 남아서

뱀파이어는 원래 그런 존재라면, 원래는 인간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날 죽였을까?

정원이가 없었다면 날 죽였을까?

계속 따라다니는 질문은 피할 수 없었다.

재윤은 변하지 않는다. 얼굴도 그렇지만, 몸을 구석구석 보게 되는 때마다, 서로의 숨을 가쁘게 할 때마다 생각한다. 정말 안 변하네. 저 눈엔 내가 변하고 있을 텐데. 아무리 ‘뱀파이어 같다’고 남들이 선우에게 칭찬이랍시고 말한다 해도. 만약 피를 빨린다 해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어떤 체액을 나누어도…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천천히 숨소리가 원래 속도로 돌아오고 서로를 마주보고 누워, 재윤은 이제 뜨겁지 않은 손길로 선우의 뺨과 어깨와 가슴과 허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수학을 하다 보면 우리가 이론적 설명에서 벗어난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고… 그러면 존재하지 않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론에서 벗어나면 안 될 이유가 뭐지? 악마는 이론에 맞나? 정원이는 이론에 맞나? 다 안 맞는 것 같은데.

“이건 일종의 거대한 착란이나 정신병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하게 만들어.”

“하지만 늙지 않고 죽지 않잖아.”

재윤은 이럴 때, 선우의 변화를 느끼겠지? 그럼 선우에게 들킨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늘 하던 생각을 입에 올려 보았다.

“뱀파이어인 거 안 들켰으면 어땠을까?”

“…….”

“역시 그럼 어느 날 잠수이별 당했을까? 진짜 싫다.”

“너에겐… 언젠가 말했을 것 같아. 믿었을진 모르겠지만.”

“난 감출 비밀도 없는데.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

“나도 인간이 되고 싶어. 인간이어서… 인간인 널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믿고 살면 안 될까?”

아니 그렇다 해도 결국 현실을 떠나야 할 때 슬퍼지는 건 변하지 않을 거야. 지금은 영원의 연속점 중 하나에 서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선우는 정원이 있기 때문에 더 깊이 생각해본 게 아닐까?

정원이 보이는 사랑의 가능성과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며

나는?

그렇게 오래 만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10년은 이미 길었다. 선우는 누군가를 이렇게 긴 시간 만나본 것이 처음이다… 그 정도 시간 동안 결혼했다 헤어진 사람도 있을 법 했다. 하지만 재윤에게는 어떨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재윤은 과거에 어떤 사람을 만났을지. 아니면 어떤 뱀파이어를 만났을지. 선우가 열 번의 인생을 산다고 해도 다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의 경험을 했을지도.

어떤 사랑을 했을까, 보다는 그런 생각 쪽이 더 질투나는 일이다.

만약 몰랐다면?

아직도 만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이 마음이 이렇게 길어진 이유 중에 재윤이 변하지 않고, 선우에게 두려움이 지워진 이후엔 신비한 기분을 들게 하는 존재인 것도 없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헤어졌을 가능성이 높겠지. 선우의 마음이 같다 해도 재윤은 들키지 않아야 하니까 떠났겠지.

나는 늙을 것이다. 나는 죽을 것이다.

재윤이 사랑하는 게 선우가 아니라 재윤과 똑같이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뱀파이어라면 둘이서 하나의 착란 속에 살아간다면 -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되고 그냥 웃으며 일상을 살아간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재윤은 그런 존재들과도 결국 헤어졌으니.

이제는 모두, 라고 해 봤자 정원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니, 희승과 종성이 추가로 알게 되었을 뿐이고. 그 정도만으로도 조금 더 거리낌이 없어진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벌써 끝이 다가오다니. ‘벌써’라고 느끼게 되다니. 선우는 텅 빈 꿈을 꾸었다. 혹은 그런 기분이다. 꿈에서 도망치듯 깨어 걸어나간 테라스의 밤 공기가 차갑다. 바람이 창 틈으로 불어들어가 재윤도 깼는지, 뒤에서 소리도 없이 다가와 등 뒤에서 가볍게 끌어안는다. 기분 좋은 체온과 목덜미에 닿는 이마와 머리카락과 뺨을 느끼다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 끝이 다가온다. 희승이, 우린 이제 새로운 삶으로 떠날 거야. 라는 말을 했을 때, 당연히 정원도 함께 가겠지 생각했다. 그럼 나는? 이라는 생각을 했다. 재윤에게 물어보지 않은 건, 당연히 헤어지겠지. 라는 생각 때문. 지금이 아니라도 끝은 언젠가 오겠지.

그래도 그게 어떤 식인지는 명확히 해야 했다.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 우리가 조금은 더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 그런 기대를… 품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재윤은 선우를 감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우리 계속 같이 있을까?”

“…어떻게?”

“너한테 훨씬 힘든 일일 거야.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등 뒤에서 흘린 숨이 목에 닿고 바람은 서늘해 선우는 픽 웃었다. 조금 좋은 기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늙고 죽잖아. 형은 아니고.”

“……”

“영원히 같이 있을 수도 없는데.”

“같이 죽을까?”

가슴이 쿵 떨어지는 듯. 지금 들린 말을, 더 생각해볼 수 있을까. 재윤은 선우의 어깨를 붙잡고, 자기도 몸을 돌려 마주보고 섰다. 이 눈에는 농담은 단 한 마디도 없다.

“뱀파이어도 죽기도 해. 뱀파이어도 죽을 수 있어. 그런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어.”

“……”

“선우야. 나는 죽을 수 있어.”

“……”

“이런 방식이 네 마음을 채워줄 수 있다면. 죽을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왜 형이 죽기를 바라겠어. 그 사랑의 크기를 확인하고 싶어서? 해를 입힐 방식으로 사랑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며. 자기가 그렇게 말해 놓고.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다면 어떨까… 하는 가능성을 저도 모르게 따져보고 있는 자신이 무서웠다. 더 옆에 오래 있으면, 자꾸 그 말을 떠올리고, 정말로 그런 걸 바라게 될지도 몰라. 재윤은 그저 듣기 좋은 빈말을 하는 걸 수도 있는데. 선우를 시험하려는 걸 수도 있는데.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지금 죽을 수도 있어.”

“같이?”

“나만 죽는다 해도 상관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떠도 재윤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이 말이 진짜라니.

그래선 안돼.

“우리 지금 헤어지자.”

어째서 ‘날 죽게 해 줘’라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거야?

어째서 이 말을 믿지 못하는 얼굴이 된 거야?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잖아.”

“……”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아.”

선우는 눈물이 많다.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알면서도 눈물이 나는 걸 막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사소한 일로 싸우고, 분하고, 속상하게 해서 운 일은 당연히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재윤이 아니라 전의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지나고 나서 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걸 이제 알아서 그럴까

지금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픈 기분도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선명히 보이는 얼굴도, 말도 없이 움직이지도 못하면서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마지막 공연이 끝났다. 기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수십 수백 번을 연주해본 곡들이고 모든 순간이 공평하게 소중해 어느 하나에 마음이 쏠리는 일은 잘 없었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선우에게 술잔을 권했다. 뱀파이어들은 잘 취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우도 취하지 않는다. 이 세 명의 뱀파이어보다도 더. 혹시 모르지, 내가 정말로 뱀파이어일지도. 정원과는 반대로 사람이 주워다 키운 뱀파이어일지도.

그런 상상을 하다 정원에게 미안해졌다. 정원과는 달리 선우에겐 인간이라는 증거가 넘치게 많다. 연속된 기억, 기억이 없는 오래된 시간에는 사진으로 남아 있는 증거들, 선우와 비슷하게 생겼고 평범한 일상의 문제들을 해결해 가며 자신의 존재 자체엔 의문을 품지 않는 가족들. 선우는 정원보다 더 확고한 존재고

그래서 정원처럼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일지도. 오래 알던 사람들, 넷만큼 서로에게 가깝진 않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고 넷만 남았다가, 침묵이 길어지다 종성이 뭐야 우리 죽는 거 아니잖아. 말했다가 아차하듯 선우를 슬쩍 보고, 희승이 정원에게 가보겠다며 일어섰다. 둘만 남겨놓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당연히 재윤과 눈이 마주쳤고 거기엔 엄청난 양의 걱정이 들어 있었지만…

내가 죽는 건 괜찮지만 남이 죽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그래서 선우에겐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슬프지 않은 이유를 찾아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당연하잖아, 헤어진 다음 재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아플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재윤은 죽지 않으니까. 재윤은…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선우야.”

“응.”

“키스해도 돼?”

아니. 고개를 저었다. 재윤은 정말 슬픈 표정 같았지만 우리는 헤어졌잖아. 손도 잡지 않고 안아 주지도 않았다. 그저 마주보았다.

“내 걱정 해 줘서 고마워.”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알아볼 수 있다면 그건 너일까 나일까.

변하는 건 분명 나인데도 확신이 되지 않아. 내 마음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 처음 알게 해 준 존재이니까.

“나중에 내가 죽을 때쯤, 죽기 직전에 한 번 와서 만나줬으면 좋겠어. 그거면 충분해.”

“…그럴게.”

“늙고 못생긴 내 얼굴을 보면 정이 떨어지겠지.”

이미 실망해서 정이 떨어져서 떠나는 걸지도 모르지. 재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조금 못된 마음으로 하는 말. 재윤의,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을 담은 표정을 보고 가벼운 기쁨을 마지막으로 느껴 보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재윤이 선우를 걱정하길 바라는 게 진심이란 건, 말할 수도 스스로 인정할 수도 없지만…

뱀파이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둘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선우는 정원이 물론 좋고 같이 사는 것도 괜찮았고 남들에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았다. 선우는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거의 없지만 정원은 그러고 싶어 보였다.

“뱀파이어한테 물리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거였다면 좋았을까?”

그러면 얼마나 간편했을까? 그 생각을 선우야말로 몇 번을 했는지. 사랑에 어째서 그만큼의 의미를 두려고. 선우는 그때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은 기억나지도 않는데. 그런 사람들이 선우를 화나게 했던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났던 건 가끔 기억나도 좋았던 순간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

몇 년이 지났는데. 그런데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정원아.”

정원이 빤히 쳐다보지만 - 형은 정말 그런 생각을 안 했어? - 그 질문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째서 재윤의 얼굴은 잊히지도 않는 것일까?

그냥 뱀파이어여서?

선우가 원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어이없어 눈물도 나오지 않는 이유로 헤어져서?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고.

정원이 떠나고

정원은 가끔 연락해온다. 희승의 곁에서, 선우가 닿을 수 없는 어두운 어딘가로 멀어져 영원히 모르게 될 줄 알았는데. 덕분에 선우는 모르는 번호에서 오는 전화도 빼놓지 않고 받아야 해서 수많은 스팸전화를 3초 정도 듣고 끊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정원은 자신과 희승의 소식을 조금씩 전해주고 선우의 소식도 묻지만, 그저 선우와 이야기하고 싶어서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받았다.

피아노랑 기타 배우고 있어. 그때 배울 생각이 안 든 게 이상하지.

이희승은 또 밴드 비슷한 거 하고 있는데 아직도 드럼은 못 구했어. 나는 힘이 약해서 드럼은 안된대.

선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원도, 선우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희승의 편지에 대한 정원의 선택은 당연히 정원에게 달려 있고, 당연히 그를 따라 떠나갈 걸 알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가지 마’라고 생각했다. 너는 그냥 인간이잖아. 뱀파이어와 함께 영원할 수 없는 삶을 살아서 어떻게 하려고? 너무 슬프지 않겠어? 이런 건 자신을 꾸며대려고 만든 가짜 마음. 진짜 이유는

네가 없으면 나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때의 증거가.

정원의 아무것도 아닌 말을 웃으며 들을 때의 기쁨은, 그것의 흔적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선우는 요즘 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배우러가 아니라 가르치러. 여전히 다른 밴드에 들어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매일의 일에서 역시 누군가를, 그가 인간을 흉내내며 살던 저번의 삶을 떠올리지 않기 어려웠지만 그러려고 애썼다. 가끔 학생 중 누군가 옛날에 팬이었다며 밴드의 근황을 물어보는데, 주로 희승의 소식을 궁금해했고, 저도 연락 안 돼요. 라고 답하면 곤란한 질문을 했구나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남의 시간에 맞춰 하는 일은 늘 피곤하다. 매일의 잠에서 새벽에 깰 때마다, 참 불규칙하고 이상하게 살았구나 다시 잠드는데

오늘은 심장이 쿵 하고

잠들 때는 없던 그림자에 숨까지 멎을 뻔 했지만 실루엣조차 잊지 않았다. 아니 변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다. 재윤이 소리도 없이 침대 발치에 서 있었다. 그늘진 얼굴로 선우를 내려다본다. 어떻게 들어왔을까? 한숨을 쉬며 몸을 조금 들었다.

“깜짝이야. 악마인 줄 알았네.”

여긴 네거리가 아니지만

이걸 소원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최악의 소원.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나 죽을 때 보자고 했잖아.”

그래서 미련을 갖기도 전에 숨을 멈추고 싶었는데. 그래야 이 마음이 아름답게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재윤의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고개만 무겁게 끄덕인다. 선우는 이제 거울 속의 자기 얼굴에서 남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변화를 찾아낼 수 있는데 재윤의 얼굴은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재윤도… 선우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느낀다면, 그 마음도 혹시 그대로일까?

“혹시 예지능력도 있어?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야?”

“아니.”

“……”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

“……”

“안 돼?“

예고도 없이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런 고요한 일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감정은 소리가 되고 긴 시간 동안 소리를 만들어내며 살아온 스스로도 해석할 수 없는 소리. 내뻗는 선우의 팔을 재윤은 바로 알아들은 듯 끌어당겼다. 서로의 가슴이 그 언제보다 무겁고 가깝게 맞닿았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선우가 반복하는 말을 모르는 척, 재윤의 손이 선우의 뺨을 감싸고 눈물로 자기 손을 적시다 멀어져 마주보았을 때.

“내 피를 마셔줘.”

“선우야.”

“안 지워질 만큼 깊게. 할 수 있지?”

“……”

“아무 일도 없지 않았잖아.”

증거를 남겨줘. 존재할 수 없는 존재가 내 옆에 있었다고. 내가 늘 혼자였던 건 아니었다고. 목을 짚는 선우의 손가락 위로, 재윤은 입맞췄다. 부드럽게 열리는 입술은 물론 뜨거웠다. 그 다음의 감각은 날카롭기보다는 매끄럽게 느껴졌다. 자신의 원래 기능대로. 피부를 파고들어, 솟아나는 피를 삼키며…

그런 꿈을 꾸다니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꿈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 아니 꿈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 선우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보았다. 흘러내린 피는 이미 사라졌지만 선명한 붉은색의 두 점, 아주 작은 심장이 그 자리에 생긴 것처럼 박동하는 통증.

선우만 기억하고 선우만 알게 될 흔적. 숨을 내쉬었다. 이 통증이 최대한 더디게 사라지길 빌며.

end

이제 진짜 끝

ri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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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Patricia Veum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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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Patricia Veum II

Birthday: 199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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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 Principal Offi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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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My name is Patricia Veum II, I am a vast, combative, smiling, famous, inexpensive, zealous, sparkling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